- 평점
- -
- 감독
- 에드바르트 베르거
- 출연
- 랄프 파인즈, 스탠리 투치, 존 리스고, 세르지오 카스텔리토, 이사벨라 로셀리니, 루시안 므사마티, 야첵 코먼
우선, 이 영화는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미감이 상당하다. 현악기를 통한 긴장감이 없었다면, 모든 장면을 연속되는 시각 예술로 받아들였을 것 같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부유한 시기에 만들어진 명화,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복장 등, 많은 것들이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일반적인 스릴러의 경우 푸르고 어두운 화면을 선호한다고 알고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릴러의 문법을 따와 긴장감을 조성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많은 장면이 절제의 아름다움을 외치고 있기에 시각적인 요소로 긴장감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극의 클라이맥스가 어디인지도 잘 기억이 안날 정도로 눈으로 보던 모든 장면이 아름다웠다. (영화를 자주 접하지 않기 때문에 감동이 더 심한것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격리된 장소에서 반복되는 선거에 대한 이야기다. 누가 교황을 해야 정당한지에 대해 다룬다. 최우선 과제는 교황 선거다. 때문에 예고편에서 펼쳐진 폭탄테러에도 선거는 이어진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감독이 중점적으로 다룬 부분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현재 혐오의 시대에 살고있다. 나는 정의에 속해있지만, 너는 아니다. 이 선거에서도 이런 생각이 많이 펼쳐진다.
- 미성년자와 관계한 과거를 가진 자, 그러나 자신은 성령의 은혜를 입었으며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후보
-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이 될 수 있다 외치는 자, 그러나 상황과 자기 이득에 따라 표를 행사하는 후보
- 미심쩍은 과거를 뭉뚱그리고, 다른 후보를 탈락시키기 위해 타인을 괴롭게 하는 후보
- 스스로에게 자격이 없다 주장하나 타인의 지지에 자신의 의지를 바꾼 후보
- 기존의 질서에 거슬르는 후보
이 다섯 후보 중 누구에게 표를 행사할까? 그리고 이 중 누가 가장 "정의로운" 사람인가?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다. 아비와 어미의 교합으로부터 잉태된 모든 이들은 원죄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왜냐?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이란 무엇일까. 선악과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이 행사하는 기적은 과연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결정권한을 가진 인간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회개할 수 있을까. 권력은 왜 탐스러운가. 다양성이 충만함의 바탕이 될까. 동성애자를 배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정당한가. 전통적 여성의 역할이 과연 보존되어야 하는 것일까. 세대별 추구하는 정의와 규칙은 계속 변하는데, 이 변화가 "옳은 방향"으로 향하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분명하게 흑백으로 나눌 수 없는 다양한 가치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포용과 인내만이 인생에 있어 정답인가. 우리는 어떻게 분노하고 어떻게 용서해야하는가. 교회 속에서 펼쳐지는 정치행위는 과연 신이 허락한 인간의 자유의지인가 아니면 원죄의 산물인가. 콘클라베는 하나님 입장에서 봤을 때 과연 옳은 행사인가.
의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영화 속에서도 확신은 큰 죄라고 말한다. 논리는 정당해 보인다. 확신함으로 시작하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라는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은 오만하다. "내가 틀렸다."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에 그의 인생은 실패만 가득하다. 그러나 동시에 확신은 필요하다. "신이 존재하는가." 이 것에 의심을 품는 자는 추기경을 할 수 없다. 신이 있음을 강렬히 설파하지 못하는 자가 종교지도자를 자처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다음 이어지는 "의심이 필요하다."라는 주장에는 의문이 든다. 의심은 과연 삶에 필수요소인가? 사후에서도 의심은 필요할까?
"죄를 짓고, 회개하고, 실천하는 자."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투표가 개최대며 진행된 설교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명령이다. 인간은 살면서 죄를 짓는다. 굿 플레이스에서도 이야기하는데, 현대 사회는 "숨만 쉬어도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다. 단순히 모르기에 짓고 있는 죄가 많다. 그리고 이는 개인이 이 부조리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쉽게 대응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스템 자체를 개혁할 수 있는 최종 결정권자가 이러한 죄를 깨닫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금 더 살기 좋은 환경이 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명제가 이러한 희망에 걸림돌이 된다. 인생은 꼭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사회도 하나의 정답만 요구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현대사회에는 각각의 개인이 정의한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다르다. 심지어 물질만능주의에 절여진 현대사회에서도 부자가 되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도 하나로 통일되어있지 않다. 때문에 현대 사회의 시스템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방기가 죄가 됨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개선시킬 수 없다. 이 결정권자가 그리는 이상적인 사회와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는 고통을 만든다. 고통 없이 어떤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고난이라고 말한다. 주님이 사람에게 깨닫음 혹은 거듭남을 이루시기 위한 필수적인 이벤트다. 이를 배제하여 살 수 있는 맘 편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신이 행사하는 고통은 괴로우나 인생에 필히 존재하는 은혜라고 참고 넘길 수 있다지만, 한 개인이 사회에 행사하는 고통은 어떠한 정당성을 부여해야하는가. 그리고 이 변화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자에게 어떠한 해결책을 전할 수 있는가.
권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산업재해 때문이다. 이걸 적는 시점에, 나와 나이가 비슷한 어느 젊은 노동자가 용광로에 떨어져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중학생때인가, 그 때에도 이런 기사를 본 적 있다. 그리고 그 기사의 덧글에 아래와 같은 시가 붙어 잠깐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그 쇳물 쓰지 마라’ 전문)
2010년에 쓰인 시다. 이 시를 쓰게 된 사건이 15년 뒤인 오늘날 반복되었다. 이는 시스템이 불러온 비극이다. 대부분의 산업재해는 여러번의 '아차사고'로 전조를 알린다. 이를 수집하여 안전한 일터를 형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동일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다은 작가가 작성한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라는 책에서도 볼 수 있듯, 노동자는 "안전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
우리나라는 "잘 사는 사회"를 "다수의 부자가 존재하는 사회"로 생각하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거부하고, 가난한 자를 배척하고, 부자가 되라는 것을 덕담으로 여기는 사회. 천민자본주의라고 깎아내리지만, '어느날 예고도 없이 거머쥔 막대한 부'에 대한 공통된 환상을 갖고 로또를 구매하는 여러 사람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의지에 맞춰, 정치생명의 연장을 위해 사고의 개선이 아닌, 사고의 가속, 극단적인 사고를 유도하는 정치인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아둥거리는 정글같은 사회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이상향을 그리는 것은 아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은 이제 사람들에게 "호구가 되어라"라고 이해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권력을 잡는 이가 어떠한 선행을 배풀 수 있을까? 단순히 경제를 일으켜 세운다고 그는 의인이 될까? 나라 내부만 정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세계 전반적으로 혼란한 정세가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지어 그 개인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의 결정에 휘청거리는 이가 얼마나 많을까? 그는 자신이 일으킨 파문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신이 만든 세상에서 인간 개개인의 태생 환경에 따른, 그리고 성취에 따른 계급화가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죄로 따지자면 정치인보다 단기간에 많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법을 발행하거나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면, 그는 대량학살에 가담한 살인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살자가 신이 만든 이상적인 사회에서 공장 노동자보다 여전히 고귀한 대접을 받을까? 사후에도 사람의 사고가 이어진다면, 신은 이 사람에게 어떠한 것을 허락하고 막으실까?
'개인 공부 > Fli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키 17 : 인간의 가치와 권력의 역학(스포有) (0) | 2025.03.09 |
---|---|
240508 "ECHOES OF THE MIST" 캐릭터 시점에서 본 모험 (0) | 2024.05.08 |
240507 "GOZZOVIGLIA" 식탐(탐욕)의 시각화 (0) | 2024.05.07 |
240506 단편 애니 "À LA FOLIE PAS DU TOUT" (0) | 2024.05.06 |
240504 단편 애니 감상 (0) | 2024.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