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0 부활절 특강 :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2)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개척되었습니다. 개척 때의 부흥은 오래가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이유와 주장으로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이 문제를 위해 편지를 보냅니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가 쓰이게 된 이유입니다.
고린도는 도시 이름으로, 이 곳은 항구도시였습니다. 많은 돈이 오가고, 사람들은 그 돈을 기반으로 여흥을 보내기에 힘씁니다. 그리고 이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라는 종교적 사상이 대중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육은 더럽고, 영은 깨끗하니 육은 함부러 써도 된다는 논리였어요. 이러한 이유로 고린도는 교회 안에서 각종 다양한 사고들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고린도전서 1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은 바울이 이미 고린도를 개척하며 이야기 한 내용을 되풀이 하는 것 같습니다. 1절에 "너희가 받은 것이요"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9절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고, 10절은 간증입니다. 개인적으로 10절이 제일 인상깊네요.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11절은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했을 당시, 그들의 반응을 떠올리게 합니다.
12절부터가 본론입니다. 1~11절이 덜 중요하다가 아니라 편지를 쓴 목적은 12절부터 시작되니까요. 이 부분은 현대에 들어서도 적용될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부활을 잘 믿지 않습니다. 한국 행정업무 중에 부활에 대한 서류가 있음을 아시나요.
인터넷 유머글에서 봤던 내용이며, 이는 사람이 아니라 인감에 한정된것이긴 하나 실제로 "죽은 줄 알고 신고한 사람이 살아 돌아왔을 때 적는 서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한정적이며, 어디까지나 말소시켜달라 청했던 자료를 다시 활용하겠다고 적겠다는 것이지 실제로 완전히 매장한 시신이 땅을 뚫고 올라와 "나 살아났다."라고 하는 경우에 작성하는 경우가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부활한 대상이 벽도 뚫고 다니고 시공간 제약 없이 여기 저기에서 보인다면 이걸 행정법에 얽을 수 있긴 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셨으며, 심지어 증인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게 희안하죠.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고백할 증인이 살아있던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죽은 자는 부활하며, 그리스도가 살아있기에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이 특별하여 그 분 만 예외사항이 된 것이 아니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기에 애써 수고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나심은 그 분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부활한다는 증거가 됨이다.
네. 사실 이걸 쓰면서도 저도 잘 이해가 안되요. 지금은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200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멸망이 오려면 이미 왔어야 할 시간이지 않나 싶은데 여전히 사람들은 잘 살아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말씀도 세상에 존재합니다. 이것도 참 신기한 일입니다. 약 2000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믿으며 영접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리고 저도 그 중 하나라니. 기이한 일이기도 하며 지금 돌아보면 참 신기한 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히브리서 2 : 8
믿음조차 저희에게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영접하는 것은 온전히 저희에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저희는 기도하고 구할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맞춰 성장시켜주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인간은 나약하고 무지하며 변덕스러워서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지 못할 뿐더러, 그렇게 갑작스럽게 얻게 된 선물로도 망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빨 교정 하듯 말입니다. 이빨 교정은 교정기를 끼고 인내해야하는 시간이 깁니다. 와이어를 교체하고, 잇몸에 나사를 박고, 생니를 빼는 그 모든 과정에 거쳐 이빨이 가지런해집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빼놓고 수술이나 기타 수단을 이용해서 단박에 형태가 가지런해진다면 과연 뼈가 그 충격을 견딜 수 있을까요.
믿음 또한 이런 과정을 거쳐 개개인에게 천천히 스며들어 변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기필코 믿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삶에 큰 고난이 있을 때 이때까지 배운것에 따라 교회에서 울겠지... 라는 생각을 한 시절의 저나 지금의 저는 크게 변화된게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옛날에는 "여유로워 보였고" 지금은 정말로 주님이 제 걱정의 상당부분을 덜어가신 덕에 진짜로 "여유로워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고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책이 가득한 곳을 좋아하고 사람과 교류하기 보다는 홀로 하는 활동이 더 편합니다. 이렇게 변화하게 된 이유는 아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어렴풋 영접해서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종말"이 저 개인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져 우주먼지 몇 톨만 우주를 유영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종말"은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변화하기 위한 한 과정이고, 이후에 우리가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종말 =/= 죽음
종말 = 부활로 가기 위한 과정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해 딱히 무언가 한 것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그만큼 열심히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고린도전서도 외울 수 있는 부분만 붙들었죠. 그마저도 아주 영혼을 다해 힘썼다고 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좀 얌체같지만 저에게는 고린도전서 암송대회보다 역대상의 족보 부분에서 대체 어떤 메세지를 꺼낼수 있는지 뚫어져라 노려다보는데 힘을 다 쓰고 있었습니다. 이게 하도 답답하니 이제는 쓰는대로 기록이 남는 필기 자체가 즐거워지더라고요. 이럴수가 진도가 팍팍나가... 한 줄 쓰는데 십분도 안걸려...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내 평생에 글을 출력하는게 아니라 단순 소제목에 합당한 구절 찾는게 이렇게 즐거워질줄 몰랐는데... )
이런 제가 기특했나봅니다. 제 생각으론 그렇습니다. 부활장을 암송하라 했더니 잠은 잠대로 디비지게 자놓고 일어나자마자 하나님 꿀잠 감사합니당~ 이러는데 주님 입장에서는 얠 미워할 수는 없는데 기특하다고 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은 애매한 놈이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아예 주님을 외면하지 않은 상으로 제게 부활의 소망을 터주신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저로서는 미운놈 떡 하나 더 준거여도 감사합니다~ 하면서 낼름 챙겨먹고 있습니다. 이렇게 써보니까 얄밉네요. 언젠가 하나님이 주신 꿀밤 맞고 뻗어서 잉잉 울지 않을까 싶습니다(ㅋㅋㅋ)
그리고 하나 더. 부활이라는 이것이 제게는 희망이라고 읽힙니다. 왠지 모르겠어요. 부활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되니까 죽음이 그렇게 압도적이지 않더라구요. 감사에 대한 감동이 꺼질때 쯤 되니까 제게 남은게 부활에 대한 작은 깨닫음입니다. 사금처럼 아주아주아주 작은 파편이지만 이만한 정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제게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 사랑, 보혈의 은혜와 부활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한마디 : 저를 변화시켜주신 주님께 감사.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