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공부/Flim

미키 17 : 인간의 가치와 권력의 역학(스포有)

킴킴스 2025. 3. 9. 23:35
 
미키 17
“당신은 몇 번째 미키입니까?” 친구 ‘티모’와 함께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지고 못 갚으면 죽이겠다는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떠나야 하는 ‘미키’. 기술이 없는 그는, 정치인 ‘마셜’의 얼음행성 개척단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고,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로 지원한다. 4년의 항해와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뒤에도 늘 ‘미키’를 지켜준 여자친구 ‘나샤’. 그와 함께,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과 출력의 사이클에도 익숙해진다. 그러나 ‘미키 17’이 얼음행성의 생명체인 ‘크리퍼’와 만난 후 죽을 위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있다. 행성 당 1명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둘이 된 ‘멀티플’ 상황.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현실 속에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자알 죽고, 내일 만나” 
평점
8.5 (2025.02.28 개봉)
감독
봉준호
출연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아키, 스티븐 연, 토니 콜레트, 마크 러팔로

 

 

그 사람은 죽는 게 일이야!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어떤 것을 문명의 시작점을 삼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남는 문명의 시작점은 "부러졌다 회복된 뼈"였다. 부상당한 개체를 내다 버리지 않고 회복까지 돌보아준 행위가 문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이러한 문명의 시작은 이럴진대 현대의 문명은 회복과 치유를 너그럽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산업화 이후로 사람은 하나의 부속품으로 사회에서 소모되는 게 익숙해졌다. 미키 17은 인간의 그 미쳐 돌아가는 기계식 문명을 우주까지 퍼트리며 오염시키는 풍경을 보여준다. 

 

미키 17의 내용은 예고편과 크게 다르지않다. 그 점에서 다행이었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라 반전의 충격에 허덕이지 않아도 됐으니까. 동시에 다소 복잡했다. 유머 아래 녹아든 문제들은 절대 가볍지 않다. "죽는 것"이 일이다. 생명이 있는 대부분의 생물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회피하는 성향을 가진다. 미키 1을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그는 ▮년이나 살아있었다. 절차상 죽어야 익스펜더블로 직무를 진행할 수 있음에도.

 

처음 프린팅 되었을때, 그리고 이어지는 프린팅 과정이 나온다. 인간 대접을 하던 사람들도 후반에는 동물이나 혹은 살아있는 단백질 덩어리로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키 스스로도 그렇게 취급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죽음은 괴로운데, 직무상 자신의 죽음을 몇 번이고 겪어야 하니까 본능적으로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린다. "난 처벌을 받는 것이다." 

 

지구에서 떠나야한다. > 그러나 변변찮은 기술로 우주로 떠날 수 없다. > 그렇기에 나는 나를 소모하기로 했다. > 이 일은 괴롭다. > 죽지 않으면 우주선에서 버려진다. + 삶을 이어나갈 수 없다. > 외부에서 원인을 찾기 힘들다. 이런 환경 덕에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결론 : 내가 문제구나.

 

흔히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이기도 하다.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원인을 자기에게 돌리는 거. 따지자면 미키의 경우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가 익스펜더블에 자원했기 때문에 반복적인 죽음을 겪으니까. 그런데 100% 미키만의 잘못이냐? 그건 모르겠다. 앞서 문명의 시작점을 돌아보자. 그리고 미키를 바라보자. 문명은 서로 돕고 잘 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추측되는데, 이런 목적 속에서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한 사람을 소모하고 있다. 말 그대로 "소모"하고 있는 이 풍경이 올바르다 볼 수 있을까?

 

 


 

 

예로부터 권력구조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다. 로맨스 판타지의 기틀은 신분사회다. 현대 판타지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신분제가 녹아있음을 본다. 판타지로 취급되는 하위 팝콘 문학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신분제의 기원은 농경 사회 이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때 재산이란게 생겨 더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이 생겼기에. 

 

단순 생산량의 차이는 문명이 발전하며 더 복잡해진 사회에서 신분제로 발전한다. 신분에 따라 죽어도 되는 사람들과 죽으면 안되는 사람들이 생긴다. 왕은 최후까지 살아남아야 하고, 노예는 언제든 죽어도 된다는 규칙말이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규칙은 현대까지 이르러 살아있다. 재산과 권력을 기준으로 민주공화국 속에서 신분제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말은 과연 누가 했는가. 모든 인간은 세상의 모든 가치에 있어 동등하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그저 "나도 너처럼 조금 더 편하게 살고싶다" 는 욕망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귀족의 예법은 교육을 받기에 가난한 평민들에게 불친절하다. 현대의 "교양 있는 삶" 또한 귀족의 예법과 다르지 않다. 복잡하다.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지혜는 풍요로울수록 좋으나, 이는 어디까지 식량이 풍족해야 성립하는 문장이다. 

 

이런 격차가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고등 교육을 받은 이는 사회를 유지하고 개선시키는 일을 맡고,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나머지는 그 고등교육자가 제작한 시스템 아래에서 하나의 부품이 되어 살아간다. 고등 교육자의 교육과정에 인성교육이 필수적으로 들어갔다면 모를까, 개개인의 양심에 따라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권한 즉, 권력을 쥐어준다면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 그에 따라 미키의 직무가 생겼다. "소모"되는 것이 직무인 사람 말이다. 

 

산업재해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의대생이 술먹다 강에 빠져 죽은 사건을 돌아보면 그렇게 허탈하다. 의사가 되는 일은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일이 숭고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전철을 안전하게 운행하기 위해, 스크린도어를 정비하고 수리하는 업무를 맡은 사람들의 일은 "쓸모없는 일"일까? 반도체 설비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일은 "쓸모없는 일"일까? 건물을 건축하는 일은? 전기 공사는? 청소하는 일은?

 

미키 17에서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면, 단 한 명의 지속적인 희생을 통해 공동체가 지켜졌다는데 있다. 미키의 수많은 소모를 통해 그들은 안전한 백신을 얻었다. 발랄하고 경쾌한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되지만, 마스크 없이 입김을 불 수 있기까지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하나 잡소리를 섞어보자면, 사형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우리나라에서 범죄자는 아무리 큰 범죄라도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근로자는 과로사로 죽어도 큰 이슈가 되지 않는다. 

 

이게 맞는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