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706 주일말씀소감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출애굽기 28:2)
성경 읽을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을 족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말씀보다 족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보고 삶에 적용하라 하면 더 막막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조금 바꿔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말씀은 족보 보다는 덜하지만 어려운거 맞습니다. 어지간하면 삶에 적용할 부분을 찾고 어떻게든 무슨 문단이라도 만들텐데 이번 말씀은 난해합니다.
제가 일반적으로 소감을 쓰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은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게 직조된 옷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라서 한 눈에 어떤 구조인지, 어떻게 입어야할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입는 스타일을 두고 패션이라고 합니다. 특정 시기에 유행하는 의복, 액세서리, 스타일 등을 아울러 일컫습니다. 그리고 그 패션 개념 중 하이 패션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오트쿠튀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사실, 오트쿠튀르란 일반인이 흔히 접하거나 자주 응용할 단어, 혹은 개념은 아닙니다. 상류층을 위한 고급 맞춤 의상에서 발전한 개념입니다. 고-급! 명품이란것이 일종의 재태크 수단으로도 응용되는 이 시기에 하이패션도 투자하기에 좋지 않겠냐고요? 과연 그럴까요.






위 사진은 2024 SS 오트 쿠튀르의 사진 중 일부입니다. 순서대로 스키아파렐리, 로버트 운,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모든 오트쿠튀르가 난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난해한 옷은 정말 난해합니다.
오트쿠튀르의 개념을 알았으니 마저 할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옷으로 따지자면 저 위의 것보다 더 난해합니다. 일단 인간을 위한 것이나 인간이 쉽게 응용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거든요. 성령이 없다면 깨닫음도 없이 지루하고 고루하며 동시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게 성경 속 말씀입니다. 어렴풋 좋은 말씀 같으나 쉽게 따르지 못할 뿐더러, 때때로 무슨 의미인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네. 때문에 성경은 인간을 위한 의복이나 인간이 스스로 갖춰 입기엔 어렵습니다. 때문에 저는 편법을 씁니다.
옷은 결국 직물과 장식물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복을 해체합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입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요. 이음새의 실을 끊어 펼쳐진 직물을 제 몸에 대보고, 팔에 맞다면 제 소매로, 다리에 맞다면 제 하의로 갖춰입습니다. 그렇게 소감이 쓰여집니다. 온전하지 않지만, 지금 당장 제가 소화할 수 있을 형태로 구성하는 겁니다. 바람직한 방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갖춰 입은거라고 취급해주시는 듯 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들어가기도 전에 뭐 이렇게 장황하냐 물어본다면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말씀 어려워요. 제가 이번 말씀을 읽어보면서 생각한 것은 제사장들의 의복에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 글에 어떤 감동을 받아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략적인 의미는 알겠습니다. 설교 초반에 친절하게 설명되어있거든요.
'제사장'은 영어로 보통 'priest'라고 하죠. 그런데 고대 로마 시대 제사장을 가리키는 'pontiff'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날엔 캐톨릭의 교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pontifex'라는 말에서 왔는데, '다리를 만드는 사람'(bridge builder)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사전에 보면 '서로 다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개선해 주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 성막이 '회막'(the tent of meeting)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만남의 장소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안 만나다가 만나는 게 쉽지 않습니다. 'Bridge builder'가 필요합니다. 그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아름답고 영화롭다고 하십니다. 제사장이 어떤 사람이길래 아름답고 영화롭다고 하실까요? 사람이 어떻게 아름답고 영화로워질 수 있을까요?
제사장에 대한 설명을 옷과 함께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이 글에서 어렴풋 파악한 것은 저희 또한 이러한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라는 교훈입니다. 어깨받이의 호마노 보석, 에봇, 판결 흉패. 민족의 이름을 기록한 것들을을 몸에 새기고, 이마에 띠를 싸고, 온 몸으로 나는 민족의 대표자라는 상징을 달고 하나님 앞에서 매일 소통하는 직분입니다. 정해진 향과 기름으로 형식에 맞춰 하루 세 번 제사(예배)를 드리고 성전에 불을 꺼뜨리지 않는 일을 합니다.
말만 들으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겠거니 싶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게 제 일이 된다면 좀 괴롭죠. 하루 세번 기도요. 그것도 타인을 위한 기도요. 제 주변인들을 살펴야만 기도제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끼는 사람들만 채워도 기도시간은 30분이 훌쩍 지나갑니다. 가족을 위한 기도, 저를 위한 기도, 나라를 위한 기도. 오... 그런데 제사장은 민족의 대표자입니다. 과연 하루 세 번 기도가 가능하긴 할까요?
설교의 말미에 이런 말을 하십니다.
제사장의 직분은 고됩니다. 전에 어떤 분은 목자님들이 양들 섬기는 걸 보고 '극한 직업'이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일이기에 그 모든 수고 역시 아름답고 영화롭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기준에서 아름답고 영화로움과 인간 기준의 아름다움, 영화로움은 다르다는건 알겠습니다. 수고롭고 때때로 어떤 보람도 없이 허탈한 이 행위들을 어떻게 아름답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미추는 단순합니다. 가꿔지고 손질되어 보기에 정돈된 것은 아름답고, 태생 그대로 마구잡이로 자라난 것들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합니다.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미추를 이야기할 때 이 기준은 더욱 강화됩니다. 피부에 잡티가 없으며, 손 발 말단에 거스러미가 없고, 눈썹은 풍성하되 말끔히 정리되어야 하며, 눈알은 핏줄 없이 깨끗하고 영롱해야합니다. 입술은 부드럽고 촉촉해야하며, 문화권에 따라 유려한 곡선으로 말려 올라가야합니다. 그 외 여러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정돈되고 가꿔진 자를 아름답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혼란을 느낍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혼란은 어김없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영화로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왜냐면 저는 하나님의 나라에 산 적이 없는데,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 새로운 기준을 갖춰야 하거든요.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협업보다는 경쟁이 익숙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을 희생하여 타인을 돌보는 것이란 어떻게 보자면 한심하고 손해보는 짓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제사장의 옷을 통해,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일 수 있습니다. 남을 '섬긴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손님은 왕이라면서 진상 퇴치도 잘 안되고, 악성 민원도 거르지 못하는 이 나라에서조차 섬긴다는 말은 쉽게 쓰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쓰인다 한들 사람들이 그것을 완전히 믿지도 않지요. 그만큼 섬기는 것은 어렵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이미 섬김을 받았었고, 받고 있으니만큼.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섬김이라하더라도 그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렴풋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조차 그 섬김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사랑입니다. 뜬금없죠?
보통 어머니의 사랑으로 대변되는 이 사랑은 쉽게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절대적으로 내 편이 되어주고, 내가 얼마나 한심하며 끔찍하고, 나약하고 부족하다 한들 아낌없이 나를 돌봐주는 이."
실제하는 어머니들의 사랑을 모욕하고자 함은 아닙니다만, 어머니들도 사람이기에 위의 욕망을 온전히 채워주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 하나님은 저 말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구약 성경만 읽고 "아닌데? 하나님 저러시지 않던데?"하면서 여러번 죽고 갈아치워진 왕들의 이야기를 내세운다면 저는 예수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같은 일을 다시 보여줘도 학습능력이 부족한 제자들을 능력 부족을 이유로 들며 내치지 않았던 분을요.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저희를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나약한지, 얼마나 의지가 약하고 무지한지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저희의 한계를 알고 그만큼 의무를 전해주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조금씩이나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부족하겠지만, 능력이란 수행하다보면 늘기 마련이고, 관계란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다보면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번 말씀에서 부담과 동시에 자유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 잘 알고 계시는데 뭐 그리 부담스러운게 있을까요. 저는 제 할 일만 하면 그만인 것을.
음... 쓰다보니 길어졌지만 내용은 부족합니다. 왜냐면 이번 말씀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후에 다시 이 말씀을 접했을 때 그 때는 좀 더 분명히 말씀 속 교훈과 그 교훈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갖고 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엔 지금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더 깊어졌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