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한강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11.11.10
좋은 책의 정의는 다양하다. 읽기 쉽다. 감동을 준다. 인생을 관통하는 교훈을 준다. 새로운 관점을 안겨준다. 접하지 못한 세상을 알게 해준다 등등. 만약 좋은 책의 정의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큰 감동과 삶을 전환할 수 있는 교훈을 준다"라면 이 책은 나쁜 책일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이지니 작가의 <무명작가지만 글쓰기로 먹고삽니다>를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책을 읽으니 확실히 알겠다. 이지니 작가는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한 분이고, 한강 작가님은 자기의 세상을 서술하기 위해 말을 덜어낸 분이라고.
책의 내용은 책의 소개글처럼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게 책 내용의 전체를 설명하기도 한다. 한 여자가 있는에 이 여자의 사정은 이러하다. 한 남자가 있는데 이 남자의 사정은 이러하다. 그리고 이 둘이 만나서 깊은 정서적 교류를 한다.
첫 장부터 여자의 처지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은 보통 자기 얼굴을 보는 것을 크게 어려워하지 않는다. 말 또한 그렇다. 그런데 여자는 자기표현을 극도로 꺼리며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이다. 극심한 자기혐오, 그것에서 기인한 실어증. 한 때 화목했으나 책에서 일어나는 현 시점에는 흩어져 파편이 된 가정.
남자의 처지가 풀어질 때부터 어려웠다. 서술자의 화법을 뜯어보며 빗물을 피하듯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책을 건드는 사람이 아니다보니까 화자의 전환을 잡아내는게 어려웠다. 남자의 처지는 시한부다. 목숨이 아닌 "정상인"의 처지에서 언제 신분이 박탈될지 모르는 사람이다. 또한 이방인으로서 그 정서가 쪼개진 사람이기도 하다.
엘리멘탈에서는 타국의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민자 2세가 흔히 겪는 문제점이기도 하며, 남자가 겪는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에 대해 본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에겐 웃거나 인사하지 않는 문화 속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걸.
알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이 왜 그 때, 그토록 뼈저린 고독함을 나에게 안겨주었는지.
대강 정리하자면 자기혐오 실어증 환자와 제외국민 시각 장애인의 교감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본격적인 교감은 책의 반을 넘어가는 시점에 일어난다. 그 전에 수업때 있었던 일들을 교감으로 따지자면 이들은 독자가 읽기 전에도 교감한 것이겠지만, 글쎄. 모든 대화를 눈으로 할 수 있다 믿는 비언어적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과 시야가 몹시 협소하여 10cm가 떨어지면 뿌옇게 보이는 선생간의 시선교환이 유의미한 교감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작가님은 그것이 교감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긴 하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단 둘이 한 공간에 존재했었고, 이것은 자기를 표출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여성을 남성이 인지했다는 것이니까. 대화도 보통 상대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시작한다. 존재하지 않는 이, 불분명한 청자에게 성대를 울려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책은 현대미술같다. 분명히 말하고자 하는 바는 존재한다. 쉬운 책은 그것이 거의 표면에 떠다니고 있어 독자가 그것을 쉽게 잡아내어 물고 씹고 햝는다. 이 책은 조각상들을 섬세하게 배치하여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다. 작가와 똑같은 사상을 갖고 고민을 한 사람이면 그것을 단박에 알아낼 수 있다. 작가와 다른 생각을 했지만, 다른 고민을 한 사람 또한 책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나도 좀 비슷하다. 이해하기 힘든 프랑스 영화를 본 느낌. 우울과 삶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권총을 들고 죽겠다 하다가 "오, 사랑!" 이라 외치며 정열적으로 사랑을 예찬하는.
여자는 이혼했고, 남자는 미혼이다.
둘이 포옹하고 입맞추는건 큰 문제가 아니다.
내 입장에서는 파편화된 페이지를 지나니까 왜 둘이 거의 연인이 되었냐는거지.
대체 둘이 무슨 결론을 내리셨기에 갑자기 입맞추나요.
노벨 문학상이 거져 주는 것이 아닌만큼 나도 그 평가자들이 느낀 감동을 누리고싶다.
문제는 내가 사랑이 뭔지 잘 모른다는데 있으며, 그것에 대해 갈망하지도 않고, 불안과 우울에 대하여 알아도 어떠한 직위에서 해제당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좀 둔하다. 삶에 이별이 없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름 살아오며 눈물 흘릴만한 고통도 겪었고, 다시 볼 수 없는 이들이 몇 생겼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 닻이 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언어로 정제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그 속에 가끔 따스하고 소중한 기쁨이 점점이 흩어져있어 살다보면 겪는 그 작고 아기자기한 행복에 기대 살아가야한다. 때문에 고통을 거부하기 위해 죽음이 좋은 선택지라고도 생각한 적이 있다. 동시에, 이 우주 속에 수 많은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며 "온전히" 공감받지 못할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한다는데 있어서 나는 특별하지도, 유일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한다. 어찌보면 여자와 비슷한 느낌이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자기부정은 자기혐오로도 보이니까. 그런데 딱히 스스로가 우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오만하다는 생각도 한다. 나는 언젠가 지금의 지위를 박탈당할 것이다. 후천적 장애인이 되든, 사회의 시류에 따라가지 못해 구세대의 기술자가 되든, 늙어 "생산성 없는 잉여인간" 취급을 받든...
나는 언젠가 남자처럼 될 것이다. 사회가 용인하는 사람에서 나를 숨겨야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자기혐오와 예정된 비참함을 포용하라는 내용이 아니기에 나의 접근법은 적절치 않다. 때문에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나침반은 여기가 목적지라고 하는데 내 앞에는 절벽이 존재한다. 그 곳에는 어떤 감동도, 교훈도, 기쁨도 없다. "그래서 이게 다야?"라는 얼떨떨하고 난감한 사람만 존재한다. 음... 이 책을 다시 읽기 위해 플라톤에 대해서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철학 시간에 낙서나 하던 사람에게는 좀 수준이 높았던걸지도 모르겠다.
그와 별개로 이 책에서 다루는 묘사들은 상당히 좋은 인상을 건내줬다. 실어증에 대한 묘사, 자기 표출에 대한 거부감에 대한 서술, 이별에 대한 생각과 사고, 그리고 다시 돌아와 남자와 여자의 눈을 빌려 보이는 세상에 대한 묘사.
그 중 인상깊은 구절은 이것이다.
침침한 조명이 밝혀진 버스 안에는 십수 명의 승객들이 침묵하며 좌석에 앉아 있다. 피로와 패배감, 오래되고 희미한 적의 같은 것이 배어 있는 침묵이다.
침묵, 피로, 패배감 뒤에 붙은 "희미한 적의". 고급스러운 음식은 아주 작은 변주를 줌으로서 완성된다. 디테일을 더하고 덜하는 것으로 평범한 음식은 미식이 된다. 그것이 조리사와 쉐프의 차이다. 누군가는 허영과 포장에 의해 만들어진 식문화라고 말할 수 있지만, 보통 맛있는 음식은 아주 특별한 재료를 더한다하여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걸 아는것이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도 그걸 느꼈다. 좋은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잡아내는 아주 기민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알았을 때의 기쁨이 좋았다.
이 책에는 위와 같은 느낌의 서술이 여기 저기 뉘어져있다. 그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내용 속에 화자의 말을 빌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표출하는 책처럼 따라가다보면 그런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 이 책은 두번이고 세번이고 읽어볼 책이 된다. 그리고 정말 납작하게 책을 사야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이 책에는 낙담하고 슬퍼하는 이에 대한 묘사가 나열되어있다. 정확히는 그 대상의 사고방식과 태도가. 살아있으니 어떻게든 살고자 하지만 그 속에 무거운 추를 몇 개나 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 말이다. 이것만 안다면 현실에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이해를 더 심도있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할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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